예수의 수태를 알린 천사, (랭스의 주교좌 성당)
중세 주교좌 성당의 신비, 그 다양한 양식, 건축의 구성미(構成美) 등을 그 본래의 의미대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비유와도 같다. 다음의 몇가지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 미술작품을 천착해도 올바르게 이해할 수 는 없다.
그러니까, (성서적 사고방식에 따라)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模像)으로 창조되었다는 점 (창세 1,26), 하늘과 땅은 하느님이 구성하신 위대한 작품으로 이해되고, 인간은 그 안에서 살며 이따금 새로이 빛과 어둠, 천사와 마귀를 판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점, 오늘의 몇가지 신학이 즐겨 강조하고 있듯이, (특히 우리가 묵상하려는 작품의 경우처럼) 구원의 선포가 훨씬 깊은 실재(實在)로서 체험되었다는 점 등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돌에 새겨진 신학이 그런 체험을 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다른 신학이 인간존재의 제반관계는 이미 포괄적으로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프랑스 동북부 랭스의 주교좌 성당 중앙의 서켠 입구에는 통칭 〈요세프스 마이스터)란 이가 조각했다는, 저 예수의 수태를 마리아에게 알린 가브리엘 천사의 조상(彫像)이 서있다. 그 우아함과 상냥함, 얼굴에 피어나는 은은한 미소로 이미 수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켜 온 걸작이다. 원래는 이대성당의 다른 자리를 택하여, 그 고지(告知) 장면의 예술적이고도 종교적인 증언의 힘을 효과적으로 나타내려고 했었다. 그래서 이 거장(巨匠)은 그때 다른 일련의 조상들, 예컨대 왼쪽 입구의 천사도 새겼고, 동정녀 마리아의 모습도 새겼다.
그런데 그 당시 성당건립에 관여한 건축가와 미술가는 그 고지 천사상의 예술적 박진성 때문에, 이 조상에 아예 어떤 새로운 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알리는 (告知] 천사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전하는 소식은 기쁜 소식(福音)이다. 즉,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결정적인 자기 증여(自己贈與)와 아울러 장구한 세월 고대해 온 구원의 때가 오고 하느님이 이 지상에 우리 눈에 보이게 나타나신다는 약속이다.
천사의 젊음, 인자하고 복스러움, 온 자태(感)에 감도는 기쁨어린 청랑(淸朝)함은 보는 이들의 눈과 마음을 마냥 즐겁게 해주고 있다.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
(1고린 2,9; 이사 64, 3: 52, 15)
사도 바오로가 고린토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신자들에게 상기시킨 위의 이사야서 말씀은 이 천사의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을까? - 즉,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게 숨어 계시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자(使者)와, 또 그를 시켜 전한 기쁜 소식을 통해, 바로 이제까지 인간이 본 적도, 들은 적도, 경험한 적도 없는 일을 밝히 드러내 보이시니 말이다. 기쁜 소식을 알리게 하신 주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것이 이 천사에게는 바로 기쁨의 근거이다. 그는 자기가 전하러 온 소식은 그 자신보다 위대하며, 사람들을 해방시켜 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행복은, 현재는 시작에 불과하지만 영속적인 행복이고 항구적인 실재(實在)이며, 원조의 타락이후 인류가 기대하고 갈망해 온 구원이다. 천사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는 마치 사람들을 놀리듯 천진난만하게 하느님을 증언하고 있는 것 같고, 이 하느님 사자의 자태 안에 하느님의 영광이 환히 들여다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