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이 있는 그곳

근대로의 시간 여행 (대구 근대화 거리)

가별의 나무 2012. 7. 31. 18:30

대구역에서 약 10여분 정도 걸어서 제일교회 방면으로 올라가면 선교사들이 살던 주택들과 의료박물관이 있는 언덕에 갈 수 있다.

 대구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낮은 이 언덕에서 대구 근대화 거리 산책을 시작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위에 백합필적에...,

이 청라언덕이 바로 내가 지금 서있는 곳이었다. 청라언덕이 귀에 익숙한 것은 

 가곡 (이은상 작시, 박태준 곡)인 친구생각 -사우(思友)에 나오는  그 언덕이기 때문이었다.


청라언덕에는 영미문학에 등장할 것 같은 고풍스럽고 우아한  서양식 주택들이 있었다.

 

그중 한 채는 대구 최초로 설립되었던 서양의학의 요람 동산병원의 역사라고도 할수 있는 의료선교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00년 대초 의료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겸자 같은 것은 요즘에도 사용하는 의료기구들이다. 


또 다른 집은 선교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초기 개신교의 역사와 유물, 그리고 구약시대의 유물을 볼 수 있었다.

초기 한국에서 어려움을 견디며 복음을 전하던 사랑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또 한 채는 지금도 생존해 있는 미국 선교사 스위츠씨 소유라고 하는데 지금은 계명대학교에서 괸리하고 있다.

동산병원에서 오랫동안 의료선교를 하신 스위츠씨는 미국에 돌아간 뒤에도 가끔 한국에 오시면

 이집의 침실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따스한 햇살이 들어와 온화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풍기는 서양식 거실과 침실은 영화 촬영장소로도 사용된다고 했다.

 

 

 

 

 

따뜻한 햇살이 퍼지는 언덕은 천천히 돌아본다.

선교사 집 앞에 있는 작은 공동묘지 은혜정원에는 한국에 뼈를 묻은 선교사들이 잠들어 있다. 

하느님의 사랑때문에 이국에서 생명을 바친 선교사들의 노고가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음을 생각하며  감사드렸다.

 

대구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우뚝선 대구제일교회.멋지고 웅장한 건물을 잘 보존하면서 사용하고 있었다.

 제일교회는 대구 최초의 기독교 교회로  선교사들은 제일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의 포교와 함께 근대적 의료 및 교육을 전개했다.

그들은 제중원(동산병원의 전신)을 세워 의료 활동을 펼쳤고 대남학교, 신명여학교를 설립해 대구 지역의 근대 교육을 이끈

역사의 증인으로 우뚝 서있었다. 



 

제일 교회 옆에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긴 계단, 3.1 만세운동길이 있다.

 90계단길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곳으로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학생들이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지나  다녔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곳이 중심가와는 떨어진 우거진 숲길이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90계단을 걸어 내려가  큰 길을 건너면 우리나라에서 세번째로 지어진 계산성당이 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성당인 계산성당은  서울의 중림동 성당(약현성당) 명동 성당 다음으로 지어진 고딕식 성당으로

 내부는 명동성당과 비슷하다.

게산성당은  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사제서품을 받은 곳이다. 

그리고 육군 소장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식을 한 장소이기도 하다. 

 

아 참! 계산성당으로 들어가는 길에 있는 이 나무는 근대화가로 이름을 떨친 이인성화백의 나무로 알려져 있다.

나무가지에 달려있는 조형물들이 특이했다.

 

 

 

계산 성당을 나와 오던 길로 나와 왼편으로 대구출신의 독립투사들과 유명인들의 모습이 그려진 벽을 볼 수 있고,

이어서 근대화거리라는 표지가 보인다.

 

 

 근대화로의 여행이라는 표지판을 따라 가다 만나는 첫째 골목은 이상화(李相和·1901.4.5~1943.4.25) 고택으로 이어진다.

 

 

 

일제 강점기에 민족혼을 일깨우던시인 이상화 고택은 도시 계획으로 다소 규모가 축소되었지만 이상화의

 생전시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유품을 만날 수 있다. 

 장독대와 펌프식 우물이 남아 있는 마당에는 암울했던 시대에 민족의 독립을 꿈꾸던 이상화의

 마음을 전해주는 대표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외 몇편의 시비가 서있다.

 

 

 

이상화 고택 맞은 편으로 서상돈(徐相燉, 1851년 - 1913년)의 고택이 있다.

이 분은 조선 말기의 기업인, 공무원으로 대구에서 지물(紙物) 행상과 포목상으로 성공한 인물로, 정부의 검세관(檢稅官)이 되어

정부의 조세곡을 관리하기도 하였다-위키백과).

 서상돈은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분으로 유명하다.

국채보상운동이란 (1907년에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대구 광문사 사장인 김광제(金光濟)와 함께 대구에서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회를 조직하고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위키백과)



서상돈은 청라언덕에 자리 잡은 제일교회와 대구 계산성당터를 기증한 대구의 거부이기도 했다.

이상화와 서상돈 두 분다 대구의 부호로 이 근처에 큰 집을 소유 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담한 기와집으로 간단하게 민족정신을 살아간 두 분의 흔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소설가 김원일씨의 마당 깊은 집의 모델인 작은 기와집과 골목근처에는 소설속 내용을 그려놓았다.



전쟁통에 남쪽으로 내려와 다가구 생활을 하면서 겪는 서민들의 애환을 그린 작품으로 그 제목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반가웠다.


근대화 골목길은 대구시의 명물인 약령시장에서 큰길로 바뀌었다. 약전골목(약령시)으로 이어지는 길은 한약향기가 가득하다.

약령시는 조선시대부터 국내 제일의 한약재시장이였을 뿐만 아니라 해외 시장의 한약재 유통의 거점역할을 했다고 한다.


약전골목길을 걸어 나와 경상감영공원을 질러 나간다.


 



꼬불한 골목길이 이어지는 곳에 수제화 구두 가게들이 이어져있다. 점점 더 허름해지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우리나라의 근대문화와 문학을 이끌던 문인들과 저명인사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드나들던 찻집, 출판 기념회를 했던 곳들...

 

 


 

 

 

 

향톤동에는 이효상, 구상, 화가 이중섭 같은 한 시대를 풍미한 문화 예술인들이 드나들던 찻집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지금은 나이

드신 분들만 오가는 골목길이 되었다. 과거의 흔적을 더듬던 향촌동길을 나오면 동성로 젊음의 거리로 연결되는 큰 길이 나온다.

 

근대화 거리의 마지막 여정으로 한국최초의 음악감상실 녹향을 찾았다.

1090년대 전쟁 시기에 많은 지식인과 문화인들에게 클래식

음악의 고향으로 자리 잡았던 녹향은 변하는 시대 속에서 사양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녹향의 설립자 이창수씨를 이어 세째아들이 운영하고 있는 녹향의

 먼지 덮인 많은 LP 레코드에서 클래식 문화를 이끌던 근대의 모습이 잠들어 있었다.  

유명한 빅터레코드사의 확성기가 초라한 실내를 장식해주는 곳.

지금은 사양길에 접어든 녹향을 살리려는 뜻있는 사람들에의해 한달에 두 번 정도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고 한다.



 대구 근대화의 산역사를 간직한 근대화거리에서 지나간 역사와 문화, 예술의 자취를 돌아 보는 소중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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