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을 글동네

나팔꽃 같은 꿈

가별의 나무 2026. 7. 20. 20:58

아침저녁의 서늘한 바람과 한낮의 뜨거운 햇빛 속에서 잘도 뻗어 오르던 나팔꽃은 이웃과 경계한 담장 꼭대기 철망끝에서 오르던 방향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러다가 자기네끼리 엉기어 그 무게로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더 이상 올라갈 지탱이 될 어떤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너도 네가 원하는 만큼 올라갈 수가 없구나. 나처럼,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서울 근교 산아래쪽에 자리한 큰 아버지 집은 구식 단독 주택이어서 마당에 몇 가지 꽃을 심을 자리가 있었다. 나는 그가 사는 서쪽 창문 아래에 여름날 오후면 길게 들어 눕는 석양을 막아 볼 겸 창 문살을 타고 올라가는 나팔꽃을 심었다.

그는 한 달이면 25일은 지방을 돌아다니는 사람이었다. 서울에 머무는 5일 정도의 시간도 새벽 일찍 나갔다 밤이 늦어서야 들어왔다. 그는 나팔꽃이 자라는 것을, 꽃이 피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어떤 날 아침 방에서 나오면서 방싯하게 핀 나팔꽃을 보면 혹시 알아? 그의 고단한 삶에 작은 위로가 될지, 하지만 아침 일찍 핀 꽃은 그의 눈에 띠기도 전에 피었다가 시들었다.

떨어지는 나팔꽃과 누렁 잎사귀들을 쓸어 모으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뇌었다. , 삶은 덧없구나. 누구나 이렇게 살다가 가는구나.

누가 기억하든 하지 않던 이렇게 씁쓸한 마음이 들 때면 나는 늘 어릴 적의 그 꿈으로 돌아간다.

 

내 인생의 고삐를 잡고 있는 어린 날의 꿈 하나. 언제 였는지 모른다.

어릴 적, 시골 우리 집 아래편에는 자그마하고 정갈한 기와집 한 채가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수도가 있는 토방을 지나 정면으로 빨래판 두 개를 붙인 넓이의 디딤돌위로 마루가 있었고 안방과 윗방이 연결되어 있었다. 안방 아래편에는 부엌이 있었다. 빗장달린 나무문을 열고 부엌으로 들어가면 가마솥을 가운데로 양편에 작은 양은솥이 걸려 있었다. 반대편에는 삭정이를 쌓아두는 제법 넓은 공간이 있었고 그 위로는 바구니, 소쿠리 같은 큰 그릇을 넣어두는 선반이 높이 매달려 있었다. 부엌 반대편 쪽으로 난 작은 문은 장독대와 꽈리 꽃이 피어있는 텃밭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어느 날 꿈속에서 나는 그 집의 댓돌과 마루사이를 지나 어두운 마루밑 공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나도 그 속으로 들어 가야했다. 그러나 나는 그 컴컴한 곳을 보기만 해도 무섭고 답답해서 숨이 넘어 갈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잘도 들어갔다. 그어둠의 공간을 지나 뒤뜰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저히 마루 밑을 통과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다. 망설이다가 뒤뜰로 나가는 다른 문을 알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뒤란으로 나간 나는 그곳에 넓고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는것을 보았다. 어두운 마루 밑을 지나 뒤란으로 나온 사람들은 나처럼 부엌을 통해서 온 사람들보다 훨씬 많았다. 바다 멀리서 하얗고 큰 배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배위에는 희고 긴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루밑을 통과하여 뒤뜰로 온 사람들은 어느새 모두 흰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항구에 정박한 큰 배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처럼 쉽게 부엌을 통해 온 사람은 배를 탈 자격이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죽음 같은 어둠이 있는 마루 밑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었다.

 

언제부터 인지 모르지만 그 꿈은 내의식 바닥에 숨어 있다가 늘 어느 순간, 좌절을 맛볼 때나 삶에서 뭔가 빼앗길 때 의식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또 뛰어넘지 못했구나 하는 자책감에 빠져들곤 했다. 좌절중 처음으로 떠오르는 기억은 초등학교 사학년 때 의 일이다. 나는 도내 미전에 학교 대표로 나가게 되어 있었는데 발표가 난지 한 달이 지나도록 담임선생님은 나를 부르지 않았다. 그 후로 얼마쯤이나 더 지난 후. 아침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은 우리 반 부반장 혜영이를 교단으로 불러내 도내 미전에서 특선을 했다면서 도지사상을 수여했다. 나는 그때 직감으로 느꼈다. 내가 그린 그림이 혜영이의 그림으로 둔갑했다는 걸, 혜영이 엄마는 당시 시골에선 드물게 담임선생님께 촌지를 바치는 사람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혜영이 아버지처럼 경찰서장님도 아니고 집에는 피아노도 없었고 나는 담임선생님께 과외수업을 받는 애도 아니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나는 전에 꾸었던 그 꿈을 생각해 냈다. 그래, 나는 제외된 거야. 그 배에 탈 수 없었잖아. 죽을힘을 다해서 마루 밑을 통과 했어야 됐는데. 내 탓이야.

시골에서 통학을 하는 아이들은 읍내 아이들을 선망했다. 자기들 보다 뭔가 혜택 받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나는 읍내에 살았지만 읍내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아버지가 읍에서 조금 떨어진 산언덕배기에서 밭농사를 짓고 돼지를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언니를 따라 돼지 밥을 날랐다. 어떤 때는 할머니랑 같이 밭에 풀을 매러 가기도 했다. 또래 애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만 빼면 나는 밭으로 가는 들길이 좋았다. 돼지우리 옆의 달맞이꽃과 초가지붕위로 올라간 박넝쿨을 좋아했다. 냄새나는 돼지우리를 언니가 청소 할 때 나는 밭에 핀 도라지꽃 봉우리를 터뜨리며 놀았다.

서늘한 바람과 대지의 온기가 만날 때 쯤 하늘 저편에서 시작되는 노을은 주변의 구름을 물들이며 내려와 들판을 뒤덮었다. 나 또한 마음속까지 붉게 물든 노을이 되었다. 그럴 때면 나는 이상스런 혼돈 속에 휘말려 들었다. 흥분과 산란함으로 이세상이 아닌 딴 세계 속에 서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은 내가 좋다 싫다 선택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거부 할 수 없는 어떤 힘같은 것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만약에 내가 정신 이상이 된다면 아마도 이 노을 때문일 거라고. 커서 생각하니 화가 고흐도 그런 노을을 보면서 살았지 싶다

읍에서 살면서 아버지가 공무원이거나 장사를 하는 집 애들은 과외공부를 한다면서 몰려다니고 선생님 집을 찾아다니곤 했다. 나는 학교 가서 공부하는 시간외에는 거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책은 나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문이 되어주었다. 책속에서 나는 현실에서 체험하지 못하는 것들을 배우고 상상력을 키워나갔다. 그 나이 또래들 세계와는 조금 다른 편에 서 있었던 것 같다. 내생각과 꿈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없었다. 말이 별로 없고 혼자 책만 보고 있는 내 곁에 다가오는 애들은 드물었다. 조숙한 것 같아도 애는 애였기에 함께 몰려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읍내 아이들 틈에도, 시골 애들 사이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나는 늘 쓸쓸했다. 나는 보통의 삶에서 제외되었다. 예전의 그 꿈처럼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내고 돌아오던 날 엄마는 날 고등학교에 보내지 않겠다고 아버지한테 말했다. 쟤는 취직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후에 입학금을 챙겨주셨다. 그것을 나중에 알게 된 엄마는 나에게 다시 너는 고등학교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입학금을 내고 온 나는 엄마의 말이 협박일 뿐이라고 생각해서 당당하게 말했다. “나 입학금 냈는걸!” 그러나 엄마는 말했다. “입학금 되찾아왔다.” 나는 그말이 거짓인줄 알았다. 그러나 엄마의 심술궂은 미소를 보고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벌려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떻게 내 엄마가, 그래. 엄마는 계모일거야. 나는 생전 엄마를 미워 할 거다. 엄마는 이제 나의 원수다. 용서 할 수 없어. 엄마는 아들만 잘 가르치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기에 딸인 나에게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후에 알았지만 당시의 그 사건은 나에겐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겼다.

다 그 꿈 때문이야. 나에게 좋은 일은 오지 않을 거야. 선택받지 못할 거야. 그때의 꿈은 내가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강하게 암시해 준다고 느꼈다. 나의 미래를 향한 꿈은 좌절될 것이다.

그 후 일 년 동안 집에서 놀면서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간 친구들과 연락을 끊고 지냈다.. 어쩌다 외출을 할 때도 친구들을 만나기 싫어 골목길을 찾아 다녔다. 그 외는 늘 방구석이나 도서실에서 살았다. 서울로 유학가 고등학교에 다니는 오빠와 아버지의 주선으로 다음 해에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엄마와는 어떤 것도 상의하지 않았다. 뭔가 한다고 하기만 하면 못하도록 막을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자신을 둘러싸는 방어벽을 세우면서 점점 더 나에게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비극적인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떤 좋은 것도 마음껏 기뻐할 수 없었다. 좋아하면 내 곁을 떠날 테니까, 사실로 가까이 오던 행운은 어느새 방향을 돌려 나를 떠나곤 했다. 그때는 모든 것이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점점 더 소극적이 되었다. 이 시기의 나를 생각하면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 꼬옥 안아주고 싶다.

학교를 마치면 아이들은 읍내가 내려다 보이는 남산공원으로 몰려가 남자애들을 만났다. 나는 그 애들과 거리를 두면서 남산에 올라가 도서관에 갔다. 이층 열람실에서 책을 보다가 창밖으로 보이는 소나무 숲 그늘아래서 쉬고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하늘에 떠있는 구름을 따라 멀리 바닷가로 마음을 실어 보냈다. 수줍고 조금은 슬퍼 보이는 얼굴로 늘 혼자인 나를 좋아하는 애들도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내 마음을 열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널 좋아하면 누군가는 그걸 질투해. 그래서 언젠가 우리는 헤어질 거야. 나는 뭐든지 안 돼. 어릴 때의 그 꿈이 말했거든. 그러면서도 나는 이루어지지 않을 미래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집을 떠났다. 서울의 큰아버지 댁에서 살면서 양재학원을 다녔고 시내의 양장점에 취직했다. 어느 날, 남대문 시장에 들러 단추와 안감재료를 사가지고 복잡한 버스에 올라탔다. 양손에 짐을 들고 중심을 잡지 못해 비틀거리던 나는 본의 아니게 옆에 서있던 여자의 발을 밟고 말았다. 내또래쯤 되는 여자였다. 너무나 당황해서 즉시 미안합니다를 연발했지만 그 여자는 들은 체도 않고 사람들을 헤치면서 내 발을 찾아내 자기 발로 한번 꾹 밟는 것이었다. 그 여자에게 밟힌 발이 그리 아프지는 않았다. 놀란 것은 이렇게 악착같은 사람이 다 있구나 싶어서였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아프게 밟은 것도 아닌데 싶어서, 어이가 없던 나는 변변히 항변도 못하고 서있었다. 차에서 내려 걸어오면서 비로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그때 제대로 말하지 못한 못난 내가 미워졌다. 바보, 왜 이렇게 멍청한 거야 등등 자책하면서 양장점으로 돌아왔다. 나는 똑똑치 못한 스스로에 화가 나 대상이 없는 분노로 속이 쓰렸다.

내가 큰아버지 댁에 머물며 양장점에 다닌지 일 년쯤 지났을 때였다. 오빠는 친구인 그를 큰아버지 댁에서 잠만 자는 하숙생으로 소개했다. 밤색 빛이 도는 숱이 많은 검은머리와 진한 피부의 그는 보통 키에 마른 몸을 하고 있었다. 어딘지 순수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유심히 보더니 아는 척했다.

, 명식이 동생 아니야? 초등학교 때 오빠 도시락 갖고 학교에 왔었지?.”

내 어릴 적 별명은 왕눈이, 눈깔망둥이었다. 나는 그 별명이 너무 싫었다. 여름날 시냇가에서 아이들이 고무신에 송사리니 피라미니 하는 것들을 잡아 올릴 때 망둥이를 잡으면 나는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하곤 했다. 눈큰망둥이를 본 애들은 틀림없이 눈깔망둥이라면서 나에게 호살을 돌려 놀려댈테니까, 초등학교 이 학년 때 나는 오빠의 도시락 심부름을 했었다. 오학년인 오빠는 오후까지 수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빠의 도시락을 나르는 심부름이 나는 고역이었다. 오빠 친구들은 날 보기만하면 놀려 댔다. ‘! 눈 크다. ! , 왕눈아, 이리와 봐어쩌고 하면서 내 갈래 머리를 잡아당기고 건드리면서 놀려댔다. 나보다 훨씬 몸이 크고 빠른 남자애들을 당해낼 수 없어서 화가 난 나는 신발을 벗어들고 누군가를 붙잡아 때려주려고 쫓아 다녔다. 아무도 내손에 잡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너무 속이 상해서 눈물을 글썽이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집에 돌아와 다신 오빠교실에 안 간다고 소리치면서 엄마에게 고자질을 하면 옆에서 듣고 있던 외할머니는 웃으시며 네가 귀여워서 오빠들이 그런다.’고 위로해 줬지만 내분함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그도 그 시절에 그렇게 나를 놀려 먹던 오빠 친구중 하나였을까. 궁금했지만 천방지축이었던 옛날의 내모습을 기억할까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는 새벽 일찍 나가고 밤늦게 들어왔다. 그의 움직임은 조용해서 나와 큰집 가족의 눈에 띠는 적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쉬는 날이면 보통 때보다 늦게 일어나 마당을 서성이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오빠 친구이고 내 어릴 적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으로 나에겐 친근함으로 다가오는 사람이었다. 가끔 양장점에서 일찍 돌아오는 날이면 나는 숙모를 거들어 저녁준비를 했다. 쌀을 씻어 압력솥에 안치고 호박을 씻어 토막내놓는다. 된장을 뜨기 위해 장독대에 가려면 대문 옆쪽에 있는 그의 방을 지나친다. 창문은 커튼이 드리워져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하행선 고속도로 휴게소에 있는 음반가게에 카세트테이프를 납품한다고 했다. 고속도로변의 휴게소를 찾아다니며 영업을 하는 그는 거의 집에 있는 적이 없었다. 잘나가는 것과 재고가 쌓이는 것을 수시로 확인하여 납품하고 반품을 받고 하는 일이 발품을 꽤나 팔아야 하는 일일 테니까.

 양장점에서 일하면서 우연한 기회에 기성복제조회사의 디자인 팀장에게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 그분은 우리 사장님의 친구였는데 아마도 내가 직접 만들어 입고 다니는 블라우스 스커트 등을 눈여겨보았던 것 같다. 눈에 확 따지 않으면서도 어딘지 개성적인 느낌의 스타일이 좋다고 했다. 그분은 사장님께 나를 데려가도 되겠느냐고 물어왔다. 어차피 양장점에서는 내가 손님에게 디자인을 제안할 처지가 못되었기에 이참에 나도 새롭게 시작해보자는 마음도 들고 사장님도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니까 이직을 허락하셨다. 남대문에 매장이 있는 중소업체였다. 그곳에서 나는 내역할을 찾았고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나의 창의력이 채택되어 상품화되는 것을 보면서 생활이 즐거워졌다. 그러던 중 경기지역으로 매장을 확장하면서 어쩌면 내가 책임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동료들도 그렇게 생각했고 나도 새로운 기회가 오기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내가 과연 그런 행운을 차지할 수 있을까?라는 자신 없음이 마음속에 잠복해 있기도 했다. 지점의 책임자로 다른 동료가 선택되었을 때 그래, 그럼 그렇지 하는 자조감이 뱃속에서부터 올라왔다. 이번에야말로 늘 수동적이었던 내 삶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켜보는 새로운 기회였는데 싶었지만, 그렇게 어릴 때부터 행운은 늘 나를 비켜 갔었다. 이번이라고 뭐 다르겠어? 그래, 나는 역시 안 되는 거야 어쩔 수 없어 라고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잊고 지낸 옛날의 그 꿈이 다시 떠올랐다. 늘 이런 식이지. 행운은 나를 싫어해.

 한동안 잊고 있던 악몽이 다시 떠오르고 서서히 목에 까지 차올라 오는 아픔과 억울함, 열등감, 패배감들의 혼합을 애써 눌러야했다.

한껏 희망에 부풀었던 얼마간의 시간은 지나고 나는 다시 의기소침해졌다. 전 같으면 이것저것 패션 잡지들을 사 모으고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전시된 의상들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아이디어도 짜내겠지만 이번엔 실망이 너무 커서 모든 것이 귀찮았다. 퇴근하면 집에 돌아와 꽃밭에 물을 주고 숙모와 함께 저녁을 지어먹고 설거지하고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았다. 가끔은 한밤중에 툇마루에 나와 앉아 잠들지 않는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그런 밤이면 대문이 조용히 열리고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볼때도 있었다. 내가 앉아 있는 쪽은 어두워서 내모습을 그가 알아채는 적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어느 날 회사에서 전화를 받았다. 고향 친구인줄 알았는데 친구의 언니였다. 친구가 교통사고로 중태라는 것이었다. 급히 찾아간 병원 응급실 한쪽에 친구는 누워있었다. 피멍이 든 눈은 감겨있었고 입에는 산소 마스크가 연결되어 있었다. 채 닦아내지 못한 피가 여기저기 몸에 묻어 있어 섬뜩했다. 성한 쪽 팔에 연결된 수액이 뚝,, 떨어지고 있었다. 가슴엔 여러가지 기계와 연결된 선들이 잇대어 있었는데 차에 부딪친 뇌가 부어오르고 있어 두개골을 여는 수술을 해야 할지 모른다고 했다.  왼쪽 팔과 갈비뼈 그리고 오른쪽 대퇴골이 부러졌다고 했다. 그러더니 의식이 없는 상태여서 수술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온통 구겨져버린 친구의 몸이 얼마나 아플까 싶어서 손을 만지는 것도 망설여졌다. 몰골이 흉한 것보다 더 나쁜 것은 혼수상태인 친구의 의식이 돌아올지 장담할 수 없다는 거였다. 한 달 전에 만나 함께 점심을 먹던 때 의 밝고 자신감 있는 친구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연결지어 생각할수 없었다.

건널목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친구에게 갑자기 음주운전자의 차가 달려들었다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유일한 고향친구였다 우리는 가끔 만나서 영화도 보고 전람회 구경도 갔다.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는 그는 나와 달랐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현실적인 애였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당시 시골에서는 드물게 서울로 대학을 갔고 학비도 스스로 마련하면서 공부를 했다. 내가 일 년 늦게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변함없이 날 대해 주었고 서울에 올라왔을 때도 여러 가지로 서울 생활에 도움을 주었다. 서로의 가정사에 대해서도 감출 것이 없는 사이였다. 그래도 그 친구는 내가 매여 있는 꿈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불행한 운명을 나 스스로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친구는 결국 의식을 돌이키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친구는 몸에 부착되었던 모든 튜브와 산소마스크를 제거하고 병원 영안실로 내려갔다. 장례식에서 나는 많이 울었다. 그 슬픔은 친구를 다시 볼 수 없는 슬픔도 컸지만 넓은 서울에서 마음을 나눌 친구를 잃은 나자신때문이었던것도 같다. 친구는 하얀 국화꽃에 둘러 싸인 사진속에서 사람들을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지금의 모든 상황들이 연극의 한 장면이기를 바랬다. 울고 또우느라고 거의 정신을 놓은 친구어머니를 어떻게 위로해 드려야 할지 몰랐다. 나는 마지막 가는 친구를 따라 장의차를 타고 벽제 화장장으로 갔다. 접수를 마치자 남자직원 둘이 나와 친구가 들어 있는 관을 옮겨 싣고 넓은 복도를 따라 들어갔다. 관이 실린 이동침대의 바퀴구르는 소리가 대리석이 깔린 바닥을 울렸다. 나와 유족들은 몰려 서서 환하고 넓은 복도 저편으로 떠나는 친구의 관을 바라보았다. 하얀 마스크를 한 직원들이 엘리베이터 입구 같은 문을 열고 관을 밀어 넣자 양쪽에서 소리 없이 문이 닫혔다. 우리는 숨을 죽인채 이 모든 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아마도 관은 지하 쪽으로 내려 가는것 같았다. 몇 안 되는 친구의 가족을 따라 나는 건물 밖으로 나와 공원으로 꾸며 놓은 옆동산으로 올라갔다. 모두들 침묵 속에서 화장장을 바라보았다. 화장장의 높은 굴뚝에서는 가끔 붉은 화염이 솟아올랐다. 넓은 마당으로 지금 막 들어오는 장의차, 오열하는 사람들, 유골함을 들고 떠나는 사람들로 화장장은 분주했다. 죽어서 말이 없어진 사람들이 주인공인 화장장에 침묵은 없었다. 높은 굴뚝에서는 가끔 표현하기 힘든 어떤 냄새를 품고 뭉클대며 솟아오르는 흰 연기가 보였다. 유골이 유해가 되는 순간일까. 나는 나무 그늘에 앉아 화장장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친구를 생각했다. 지금쯤 어떻게 되어있을까 뜨겁지는 않을까. 친구가 화염에 싸이는 모습이 실감나지 않았다. 친구의 넋은 아마 그곳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보고 있을 거야. 한참을 울다 지친 친구 어머니는 언니에게 기대어 앉아 있었다. 나는 옆에 피어있는 하얀 마가렛 꽃을 만지작거리다 아예 한 송이를 낚아채 꺾어버렸다. 꽃잎을 하나씩 뜯으면서 염습을 할 때 마지막 본 친구의 모습을 생각했다. 가족들은 하얀 소복을 친구에게 입혔다. 세상을 떠날 때는 하얀 옷을 입는 건가. 그래, 그렇게 하얀 옷을 입고 저세상으로 간 친구를 누가 마중 나올까.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예전의 그 꿈, 멀리서 푸른 물살을 헤치고 항구로 들어오던 배.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배위에 서있었다. 친구는 그럼 그 어둠속 죽음 같은 마루 밑을 지나 배를 타러 간 것일까? 흰옷을 입고? , 그렇다면 혹시 그 꿈은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그 배에 타지 못했던 것은 아직도 이승에서의 삶이 남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럼 그동안 나는 나의 운명을 그 꿈과 관련지어 생각하며 삶의 고비를 넘어서야 할 때마다 그 꿈에게 핑계를 대면서 헛되이 절망을 계속하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 때 얼굴가득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배위에 서있는 친구의 모습을 본것 같았다. 한순간 마음속까지 어떤 빛이 도달한 느낌이었다. 그렇구나. 그 꿈은 죽음에 관한 것이었어. 나는 그 배를 탈 사람이 아니었던거야. 모든 것이 밝아졌다 그렇구나. 그런거였네.

일요일 늦은 아침, 목에 타월을 감고 슬슬 마당을 오가던 그가 창을 타고 올라간 나팔꽃앞에 서서 한참이나 방싯하게 핀 푸른 꽃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그러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잇었다.

명애야, 이 나팔꽃 보니까 고향 생각난다.”

그는 오빠한테 도시락 심부름을 하던 예전의 왕눈이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뿌리 쪽에 난 나팔꽃 잎사귀들은 누렇게 떠서 말라가고 있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이파리와 널쿨은 무성하게 엉겨 있었다. 아래쪽에 피었던 꽃들은 시들어 둥근 씨주머니가 되었다. 위로 오르면서 나팔꽃은 계속 피고 지고를 계속했다. 줄기는 더 올라갈 수 있을 만큼 뻗어 오르고 자기끼리 엉크러지면서 옆으로 퍼져나간다. 그렇게 위로 오르지 못한다 해도 꽃은 피고 씨앗을 맺어간다. 누구 탓도 하지 않고 제 삶을 사는 밝은 꽃을 보면서 나도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열매를 맺는 가을이 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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