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한 잔 주세요.”
“네, 곧 준비해 드릴게요.”
점심시간에 한바탕 손님을 치른 후의 노곤함이 몰려오는 시간, 나는 기계적인 응답과 함께 카운터에 놓여진 카드를 받아 처리한 다음 카드를 카운터에 올려 놓으면서 비로소 손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어머!”
“선생님!”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우리는 동시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짧은 순간 말을 잃었다.화들짝, 졸음이 달아난다.이게 누구야.
“와! 선생님, 살다보니 이렇게 만나는 날도 있네요.근데 별로 변하신 게 없네요. 전, 사 년 전에 결혼 했어요.작년부터 이 커피숍을 남편이랑 함께 하고있어요.세살짜리 딸 하나는 친정어머니가 돌봐주셔요.”
칠 년여의 세월이 흐른 지금 뜻밖의 장소에서 기억하고 싶지 않을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 당황스러워 하는 그의 표정을 읽었지만 모른척했다.나는 평소의 재치와 활달함을 발휘하여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의 쑥스러움을 넘겨버렸다.알 커피를 갈아 포트 윗부분에 담고 아래에는 물을 받아 한데 합쳐 가스 위에 얹어 불을 켜놓고 커피 잔을 준비했다.빠른 손놀림 못지 않게 머리를 굴리며 지금 이 여자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상상했다. 그는 카운터 가까운 자리에 앉아 내가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나를 이리저리 관찰하고 있겠지. 그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아도 그의 착잡한 마음이 전해진다.나를 만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물위로 떠올랐을테니... 하지만 이미 커피를 주문했으니 그냥 나가버릴수도 없고, 나는 작은 커피잔에 검고 짙은 향기를 올려내는 커피를 따라서 그가 있는 탁자로 가져갔다. 마침 좁은 실내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여기있어요. 선생님.”
그는 커피 잔과 받침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여전히 활달하네요. 좋아보여요.”
나는 대답 없이 웃으며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사실 늦은 오후에만 아르바이트생을 쓰면서 남편과 둘이서 이 작은 커피체인점을 운영하는 것이 피곤할 때도 있지만 사는 게 재미있었다. 맑지 않은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그는 유명 브랜드의 베이지색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옷의 칼라 깃에 묻은 때와 가슴 근처에 빨간 김칫국물 자국이 보였다.저런,커피를 음미하듯 한 모금씩 마시는 그의 얼굴은 예전보다 더 표정이 없었다.굵은 머리칼은 어수선했다.화운데이션이 겉도는 화장은 우툴거리는 피부를 감추지 못했다. 전에도 그랬지만 검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얼굴빛은 가만히 있으면 어딘지 무서운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그의 모습은 칠칠치 못했다.전에도 그의 옷은 늘 고급스러웠지만 깔끔하진 못했다.그상태가 더 심해진 것이다.지금 그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입가에 묻은 음식 부스러기를 털어주기 위해 손이 올라갈 뻔 하는걸 참았다.
“지금은 어디 계세요?”
“낮에는 집에 있고 야간에 산부인과병원에 나가요.오늘은 시내에 나왔다가 점심 먹고 커피를 마시러 들어왔는데…”
아마 점심도 혼자 먹었을 것이다.저런 차림새로 누구를 만나지는 않았을 테니,그와 나는 오래 전에 알고 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주로 내가 아는 정보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럴 것이 그는 시골 병원을 떠난 후 아무와도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선생님, 너무 반가워요. 다음에 또 이 근처 오시면 들르세요. 꼭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굳이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나를 만나면 불미스러운 스캔들로 끝난 시골병원의 생활을 떠올리게 될 텐데 그것이 달가울 리가 없지 않은가.
개인 병원에 야간당직 의사로 나가는 그의 생활은 어떤 것일까.밤에 산부인과를 찾아가는 여자들을 상대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짝 의구심이 들었다.의사로서는 좋은 분이었는데 지금은 어떤가. 혹시나 전에 하지 않던 임신중절 같은 것을 하는 게 아닐까.그는 나보다 여덟 살이나 연상인데도 전부터 그와 함께 있으면 내가 더 성숙한 것 같은 느낌이 들곤했다.결혼을 해서 애기 엄마가 된 지금은 더욱 그랬다.
칠 년전,나는 읍 소재지에 있는 병원 원무과에서 일하고 있었다.스물 넷의 시골 처녀였던 나에게 서울에서 온 서른 다섯의 미혼 산부인과 의사는 참으로 동경의 대상이었다.굵은 웨이브의 중단발머리에 하얀 가운을 입고 진료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그는 예민한 환자들의 말을 친절하고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좋은 선생님이었다.가끔 임신중절을 위해서 산부인과를 찾아 오는 여자들을 그는 좋은 말로 설득해서 돌려 보냈다. 출산을 앞두고 입원한 산모들은 아기 낳을 때의 고통을 무서워하지만 그의 친절한 말과 자상한 인도에 신뢰를 가졌다. 수술을 집도 한 후 초록빛 가운을 입고 수술실 밖으로 나온 그의 모습에서는 최선을 다 한 사람의 피곤함이 엿보였었다.그의 외모는 좀 독특했다.눈,코,입,어디가 특별히 모자란것은 아닌데 전체적으로 인상이 어두워 못생겼다는 느낌을 주었다.지금 생각하니 마음의 어둠이 표정으로 드러났던 것일까.거친 피부의 얼굴은 검은데다 어딘지 푸른 기가 돌았다.그렇지만 의사라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그는 나에게 존경심과 함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서울에서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명문 의대를 나왔다는 그가 어떻게 이런 시골까지 오게 되었을까.내가 맛보지 못한 못하는 대학생활과 더욱이 그 힘들다는 의대생 이었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대로 잘 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고 있을까 등등.그는 주말에도 서울에 올라가는 일이 없었다.연락하고 지내는 친한 친구도 없는 것 같았다.그를 찾아 오는 사람도 그가 찾아 가는 사람도 없었다.그렇다고 어떤 특별한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퇴근 시간 후에는 병원의 직원들과 시간을 보냈다.먹는 것을 좋아해서 우리에게 자주 먹을 것을 사줬던 기억이 난다.성격이 소탈한 그는 동료 의사와도 잘 지내는 것 같았지만 함께 외출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그는 나에게 가끔 맛있는 저녁을 사주기도 했고 냇가를 함께 산책하면서 나의 말을 경청해주었다.나이도 많고 세상 경험도 많은 그가 나 같은 어린 사람을 같은 동료로 대해주는 것이 놀라웠다.그와 나누는 대화는 나의 지적 호기심과 선망을 불러 일으켰다.한번은 내가 성당에 가서 기도하고 있는데 그가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 놀란 적이 있다.작은 시골에서의 생활이 무료 해서 그랬을지 모른다.그는 나의 청교도적인 심성을 존중했지만 한편으로는 조롱거리로 삼기도 했다.대화중 나름대로의 철저한 이성관을 펼치는 나에게 일부러 성적인 짗꿏은 이야기를 하면서 쿡쿡거릴 때도 있었다.
“흐흐,그게 얼마나 좋은 건데…”
너는 아직 뭘 모른다는 뉘앙스가 들어 있었다.어떤 날 그를 따라 처음으로 맥주홀에 간적이 있다.그는 술을 주문하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그는 나의 놀란 얼굴을 바라보며 재미있다는 듯 심술궃게 담배연기를 뿜어 냈다.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훑어보았다.어둑하고 느린 색소폰음률이 만들어내는 관능적인 분위기를 감당하기 어려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 나는 당황했지만 이상하게 화는 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오히려 그의 내면에 숨은 외로움을 본 것 같아 한자락 연민의 감정이 올라왔다. 그 일이 있은지 며칠 후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자신에 대해 말해주었다.
“대학 1학년 때 친구를 잘 못 만났어요. 아무도 나를 잡아주지 않았어요.지금도 부모님은 나를 버린 자식 취급하셔요.”
구체적인 이야기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의 윤리적 삶은 그때부터 내리막길 이었던 것 같다.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그에게서 짙은 고독감이 묻어났다.나는 그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는데 그때 자신이 잘못 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왜 다시 시작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었다. 그의 삶이 무질서 하다는 것, 그의 생활엔 어떤 목적의식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그러면서도 어떤 일 앞에서 사리에 맞게 판단하고 의견을 말하는 그의 지성은 별개인가보았다.어떤 월요일 아침, 병원의 독신자 숙소에서 생활 하던 그가 아침 진료시간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서울 집에 간 것도 아니었다. 내가 알기로 그는 거의 집과 연락을 끊고 살고 있었다.모두의 궁금증은 오후가 되어서야 풀렸다. 그가 이웃 도시의 한 여관 이층에서 떨어져 골절과 찰과상을 입어 근처 병원에 입원하고 있다는 연락이 온 것이었다.술에 취해 나체로 잠을 자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문을 열고 발을 내딛은 곳이 거리로 난 창문 이었던 것이다.그때 그는 어떤 남자와 함께 함께 있었다고 했다. 그와 함께 있던 남자는 읍내에서 작은 자전거점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에게는 아이와 부인이 있었다.이 엽기적인 사건 이후 그에 대한 온갖 추측이 작은 읍내에 들끓었다.여자가 빨래도 할 줄 몰라 방이 온통 벗어 놓은 속옷으로 가득하다던지, 세상에,어디 남자가 없어서 의사가 시골 자전거수리점 주인을 만난다느니...유능한 의사가… 환자들에게 진통제로 사용하는 마약을 처방하여 자신이 사용했다느니 하는 수많은 말들이 난무했다.이 일을 수습하기 위해 아버지와 남동생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점잖은 인상의 그의 아버지는 병원장에게 수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하다고 말했다. 누나와 달리 깨끗한 인상의 남동생은 그가 시골에서 장만한 빨간 자전거를 챙겼다. 그 사건은 나에게 환경과 조건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었다. 과연 사회에서 돋보이는 지위가 그사람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는 것인지도 그렇고, 그의 이중적 삶의 형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커피를 마시고 초라한 뒷모습을 보이며 거리의 인파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감정이 밀려 왔다.우연히 세월 속에서 한 사람의 삶이 망가져 내리는 모습을 관찰하게 된 오늘따라 거리의 가로수에서 떨어지는 낙엽이 가는 곳이 어딜까 새삼스럽게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