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다 올라왔다. 손전등에 의지하여 어둠을 뚫고 올라온 노고단, 성삼재에서 출발할 때 보다는 무게가 덜한 어둠이 아직도 짙게 깔려있다. 이곳 저곳 우리보다 먼저 산장에 도착한 사람들의 형체가 보인다.우리는 산장의 불빛이 비치는 곳에 있는 나무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교대로 화장실을 다녀 온 후 각자 배낭에서 빵을 꺼내 이른 아침을 먹었다. 옆으로 사람들이 부산하게 오간다. 주변을 감싸고 있는 어둠은 아직 잠자고 있는 새벽을 깨우기가 뭣한가 보았다. 어둠속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긴장감과 맞물려 노고단에서 맞는 차가운 공기는 거의 한 시간여를 걸어온 열기를 가라앉힌다. 앞쪽으로 노고단 정상이 벽처럼 우뚝 서있다. 새벽을 감싸 안은 어둠속으로 오가는 사람들의 형체가 일렁대며 지나친다.구월, 산속의 새벽 다섯 시는 아직 어둡다.
지리산 종주를 계획하고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고 챙길 것을 나눌 때부터 내마음속에는 기대감과 함께 미묘한 갈등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리던 지리산을 만나러 간다는 기쁨이 다른 자잘한 걱정들을 없애주었다.나는 함께 갈 친구들에게 등산에 필요한 이런저런 것들을 설명해주었다.
준비물중 제일 부담스러운 것이 먹을 것에 관한 것이다. 버너와 코펠은 산을 내려올 때까지 무게가 줄어들지 않는다. 대신 쌀이나 간식, 라면 같은 식품들은 등산을 계속할수록 무게가 줄어들기에 누가 버너와 코펠을 챙기는가 하는 것으로 은근히 신경전을 벌리게 된다. 음식물들은 공평하게 간식까지 나누어 각자의 배낭에 넣으면 되었다. 그리고 각자 필요한 옷가지들을 준비하면 된다. 하지만 나는 늘 지니고 다니는 중형카메라와 렌즈의 기본적인 무게 때문에 어떻게든 공동 물건을 줄여보려고 잔머리를 굴린다.
그렇지만 이박 삼일의 긴 산행에 누가 남의 짐을 지어주려고 하나. 자신의 짐무게만으로도 힘겨운데. 할 수 없지. 먼 산에 갈 때마다 나는 늘 필요한 물건과 그 무게 사이에서 어느 것을 택해야할지 고민에 빠진다.
“손전등 잊지 마, 개인 수저 잘 챙겨. 양말 갈아 신을 것하고 바지랑 윗도리 여분이 있어야 해, 자기 것을 잘 안 챙기면 다른 사람까지 피해가 가니까 조심해줘.”
그랬는데도 영미, 걔는 손전등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삼재에서 노고단까지 올라오는 길에 얼마나 힘이 들었나. 내가 가진 작은 손전지로 그의 앞길까지 비춰주어야 했으니. 설상가상으로 가다가 손전등에 약이 떨어진 것이다. 나는 일부러 그가 들으라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하지만 어둠 때문에 보이지 않은 내얼굴은 더 험하게 찌그러졌다.으이그~ 준비를 하면서 그렇게 잔소리를 했건만, 그의 둔함으로 이번 산행에 내가 얼마나 조바심을 치고 짜증을 내게 될지 걱정된다.
빵과 커피로 배를 채운 우리는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음~ 이제 한 끼를 해결했구나. 하지만 배낭의 무게는 달라진 것이 없다. 노고단 자락을 지나면서 하늘은 멀리부터 붉게 열리고 날은 점점 밝아졌다. 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풍경들을 곁눈질하며 부지런히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노고단에서 출발할 때는 거의 행렬하듯 사람들이 줄을 지어 등산로로 들어섰지만 어느만큼 지나서는 각 팀의 분위기와 걷는 속도에 따라 점점 사이가 벌어진다. 우리 셋은 오늘의 목적지인 벽소령 산장까지 가기 처음엔 부지런히 걸었다. 등에 짊어진 짐의 무게로 점점 말은 줄어들고 계속 뚜벅뚜벅 걷는다.키가 큰 영미는 긴 다리로 잘도 걷는다.
나는 새벽에 후래쉬 때문에 열이 올랐던 마음을 잠재우고 부지런히 걷는다.얼마를 걸었는지 솟아나는 땀으로 입었던 점퍼를 벗어 배낭 속에 집어넣었다.영미가 배가 고프다며 잠깐 쉬면서 간식을 하자고 말했다.그런데 영미는 제몫의 간식으로 내가 사준 빵을 집에다 빼놓고 왔다는 것이었다.무게를 줄이려고 그랬다는 것이다.내가 세운 계획으로는 다음에 먹을 음식을 당겨 먹으면 안되는데.나는 어이가 없었다. 간식이니,식사니 모두 철저히 계산해서 가져왔기 때문에 계획대로 하지 않으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초조해졌다.아무리 여유가 있어도 그렇지 얘는 매사 이런 식으로 초를 치더라 싶으니까 배꼽에서부터 슬슬 화가 올라온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같은 영미의 무던함은 그의 큰 장점이지만 결정적 순간에 나를 긁어 놓는다.그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순덕이는 중간에서 완충장치 역할을 해준다. 순덕이는 자기 몫의 간식을 영미에게 주고 나를 다독인다. 순덕이에게 나는 내몫의 빵을 나누어 주었다.일단은 그렇게 넘어 가지만 출발전에 애써 내가 말해준 것들을 영미가 건성으로 들어 넘겼다는 것이 화가 난다.나는 영미가 나를 무시했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하고 점점 더 짜증이난다. 게다가 내 계획을 따르지 않아 등산의 즐거움을 반감시켜버린 영미는 겉으로는 여전히 태평하다. 바른말하고 따지고드는 나만 잔소리꾼이 되는 것 이 참을 수 없다.어휴,저 답답이하고 어떻게 계속 등산을 하지? 아니,지리산에 같이 가자고 조른 게 누군데,경험자인 내말을 왜 안 들어? 모든 계획을 다 세우고 챙기고 음식준비에 산장 예약까지 다한 내의견을 들어야 할 거 아냐? 등등 나는 입을 다물고 앞질러 걸으며 속으로 투덜댔다.마음속으로는 이러면 안되는데,모처럼 온 지리산행을 즐겨야 하는데 싶은 조급함과 더불어 쉽사리 정리되지 않는 감정때문에 초조해지기까지 했다.
식수가 있는 연하천 산장 주변 여기저기엔 먼저 온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점심을 준비하거나 먹고 있었다.우리도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샘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배낭을 내려놓고 점심을 먹기로했다.첫날인 오늘 점심은 집에서 준비해온 김밥을 먹는다.그런데 영미는 개인 수저도 빼먹고 안가져왔다.내얼굴은 또 찌푸려진다. 대체 영미 너 도대체 뭐냐? 저 느긋한 태도하고는.내입이 나오기 시작하자 순덕이는 그만,너 또 짜증 시작할거야? 하는 시선으로 내 입을 막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나는 영미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몸을 옆으로 돌려 앉아 샘터에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샘가에서 허름한 베이지색 잠바에 검은색 등산바지를 입고 배낭을 멘 남자가 빈병에 물을 채우고 있었다.일행이 없이 혼자인 것 같았다.물을 채운 그 남자는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심각한 그 표정은 등산을 즐기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그사이 순덕이는 어디선지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얻어와 영미에게 내밀었다.벽소령산장까지 우리 일행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가니 하면서 부지런히 걸었다.오후 다섯 시 쯤 오늘의 목적지인 벽소령산장에 도착했다.우리는 취사장으로 내려가 한편에 자리를 잡고 저녁식사준비를 시작했다.영미는 그동안 어설프고 느긋하던 태도를 바꿔 부지런히 움직였다.내가 배낭에서 버너를 꺼내 불을 피울 자리를 찾자 영미와 순덕이는 코펠에 쌀을 담아 들고 빈물병을 챙겨서 식수대 쪽으로 내려갔다.먼저 다녀간 사람들이 두고 간 음식찌꺼기들이 널린 탁자를 치우고 순덕이가 씻어온 쌀을 코펠위에 얹었다.불을 무서워하는 나대신 영미가 버너를 조작해 불을 붙였다.순덕이가 뚜껑위에 돌멩이를 하나 얹었다.밥이 끓기를 기다리며 우리 셋은 비로소 세상과 떨어진 산속에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취사실밖 공터 아래로 산과 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가슴이 훤하게 뚫리는 맑은 바람.나는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약간 설은것 같지만 밥이 다 되었다.주변의 경치를 내려다보며 우리가 밥을 먹기 시작할 때 한 남자가 내려왔다.그는 취사실 주변을 둘러보고는 다시 위쪽으로 올라갔다.그이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있었다.아까 연하천 산장에서 본 사람이었다.
서울에서 지리산 등반을 계획할 때는 산장에서의 밤을 야외에서 별을 보며 산책을 해보리라,그리고 적막한 밤의 소리를 들어보리라 생각하지만 정작 산에 와서 저녁때 산장에 도착하면 생각한 것과 다르게 시간이 지나간다.부지런히 먹은 그릇을 치우고 다른 등산객들이 몰려들기 전에 눈치껏 식수대에서 얼굴과 발을 대충 씻고 산장에서 빌린 모포속으로 들어가면 화장실 가는것 외에 다시는 밖에 나올 일이 없다.여분의 바지를 챙겨오지 않은 영미는 낮동안 걷느라고 땀절은 바지를 입은채 모포를 펼치더니 그속으로 들어갔다.그걸 보는 나는 기가 막혔다.갈아입을 옷을 안가져 온것이다. 하지만 제가 일아서 하는데 싶어 잔소리가 나오려는 내 입에 얼른 자물쇠를 채웠다.우리는 나란히 누워서 내일 걸어야할 여정과 떠나온 도시를 떠올리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잠이 들었다.
새벽 네시, 아직 깜깜한데 주변이 수런거린다.뻑뻑한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순덕이와 영미를 흔들깨웠다.산에서 맞이하는 9월의 새벽바람이 몹시 찼다.짙은 회색빛 풍경 속으로 사람들이 옷깃을 세운 채 오가고있다.오늘 아침엔 어제 저녁에 남은 찬밥이랑 라면을 끓여 먹기로했다.산장 앞의 탁자에 앉아 물이 끓는 동안 신지 못한 양말을 주워 신고 배낭속의 내용물을 하나씩 들어내며 정리를 한다.아침에 먹을 라면은 누구 배낭에서 나올 것인가 계산하면서,오늘의 목적지인 세석산장으로 가는 길을 생각한다.그러는 사이에 사람의 얼굴을 알아 볼 정도로 날이 밝아온다.라면이 끓었다.영미가 면발을 젓가락으로 들어올리는 내 팔을 찔렀다.
“왜?”
“저기좀 봐.”
한 남자가 밝아오는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한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산에 까지 와서 급하게 연락할일이 있나보지.어제 본 그 남자였다.
“……”
나는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영미를 바라보았다.
“아침 같이 먹자고 할까?”
나는 얼굴을 찌푸려 웬 친절? 하는 표정을 지었다.하여튼 오지랖도 넓어.
“저사람 어제부터 우리랑 같은 코스로 왔잖아.여러번 마주쳤어.근데 어제 저녁도 안먹는거 같더라.어제도 취사실에 들어왔다 그냥 나갔어.”
나도 그걸 보긴 했다.하지만 영미처럼 생각하지는 못했다.지리산종주의 대표적인 코스가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니까 비슷한 시간에 출발하다보면 같은 사람을 여러 번 만나는 경우가 생긴다.저사람도 그런 경우일 것이다.그렇다해도 우리 먹을 것 밖에 없는데? 나는 순덕이를 쳐다보았다.순덕이도 딱하다는 표정을 짓고 말이없었다.분명히 어제도 먹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남자와 같이 밥을 먹자는 영미의 마음은 단호했다 나는 뜨악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영미는 잽싸게 라면을 건져낸 물에 라면 한 개를 더 집어넣고 불을 붙였다.그리고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이리 오셔서 저희랑 아침좀 드세요.”
“아,네,괜찮습니다.그냥 잡수세요.”
대답은 그렇게 해도 그 사람의 시선은 벌써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라면에 꽂혀있었다.영미는 선뜻 대답하지 않는 남자의 팔을 잡아 끌어 우리 옆에 앉혔다.순덕이는 나무젓가락을 갈라서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죄송합니다.감사합니다.”
몇 번을 사양하던 남자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우리는 각자 그릇에 담긴 라면을 먹기 시작했지만 나는 영미의 너그러움이 못마땅했다.딱 짜여진 음식인데 어쩌려구 저러냐 싶어서,남자는 먹으면서도 미안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하지만 어떻허나 이미 시작한 자선인데,나도 애써 좋은 표정으로 함께 먹었다.속으로는 현실감 없는 영미에게 치를 떨었지만 내색하지는 못했다.나는 남자를 찬찬히 바라보았다.등산모자 아래로 감춰진 얼굴은 검었지만 단정했다.사십대 초반쯤 되었을까.막일을 하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영미는 남자가 먹고 있는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주었다.남자는 미안해 하면서도 배가 고팠는지 잘도먹었다.따뜻한 음식이 들어가자 새벽의 찬공기로 움추려 들었던 몸이 풀렸다.이쯤되면 마음이 풀려 이야기를 시작하련만 남자는 말이 없었다.순덕이는 그 남자에게 호기심이 생긴 것 같았다.
“아저씨,궁금한게 있는데요.”
“뭐가요?”
“저기요,어디로 그렇게 전화를 하시는 거예요?”
“그러게,잠시라도 세상을 잊자고 온 산속에서 웬 전화를 그렇게 하세요?”
농담 삼아 순덕이는 계속해서 물었다.남자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순덕이는 그냥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서 한 질문인데 분위기가 더 어색해졌다.남자는 대답이 없이 라면을 국물하나 남기지 않고 먹은 후 일어서려다가 영미가 잡는 바람에 커피까지 마시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말 고맙습니다.잘먹었습니다.”
“괜찮아요.먼저 가세요.저희가 정리하고 갈 테니까요.”
미안해하는 남자를 먼저 보내고 우리는 설거지와 뒷정리를 했다.어제에 이어지는 영미의 엉뚱함에 약이 올랐지만 자칫 친구 하나 잃을까봐 끓어오르는 화를 참느라고 애를 썼다.영미 너랑 다시는 산에 오나봐라 싶은 생각으로 혼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이런 내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미는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앞서서 성큼성큼 걸었다.어제 종일 혹사시킨 다리가 시큰거리고 아팠지만 기계적으로 뻣뻣하게 걸음을 내딪었다.얼만큼이나 지났을까.점차로 굳었던 다리가 풀리면서 산속의 청량함을 즐기며 걷고 있었다.내가 사진을 찍으려고 자주 멈추었기 때문에 발이 빠른 영미와 순덕이는 한참을 앞서가다가 내가 보이지 않으면 가던 길을 멈추고 기다려주었다.자주 반복되는 이 일이 짜증도 나련만 그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얼마나 걸었는지 끊임없이 흐르는 땀으로 온 몸이 젖었다.능선을 따라 걷다가 밧줄을 타고 바위위로 올라가 다시 내려오는 길은 몹시 위험했다.조심스럽게 바위를 손으로 바위를 짚으면서 올라가니 전망이 좋았다.우리는 말을 잃고 서서 아래로 까마득하게 펼쳐지는 진하고 흐린 녹색,그리고 조금씩 단풍이 들어가는 거대하고 우아하며 화려한 양탄자를 내려다 보았다.이 맛이야.지리산을 찾아오는 것은.나는 시간을 잃고 자연에 취해있었다.오가는 구름은 앞에 있는 산을 감추고 뒤편에 우리의 모습을 숨겼다.그때 순덕이가 나의 명상을 깼다.
“저길 좀 봐.”
순덕이가 가르친 곳은 우리가 있는 곳보다 훨씬 더 높은 곳으로 잘 바라보지 않으면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모르고 지나쳐 버릴 수 있는 곳이었다.그 위에 아까 우리와 아침을 같이 먹은 남자가 뒷모습을 보이며 앉아 있었다.손에 휴대폰을 들고 다른 손에는 등산화를 들고 있었다.한사람이 겨우 앉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좁은 바위에 앉은 모습이 위험해보였다.저남자 대체 뭐하는 거지? 저높은데서? 우리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며 마음을 졸였다.
“아저씨! 거기서 뭐하세요?”
영미가 소리쳤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저씨,이제 그만 우리랑 같이 가요.”
순덕이도 소리쳤다.나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저아저씨 대체 왜저러니.무서워 죽겠네.때마침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그남자는 우리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는지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얼마동안 우리는 그곳에 서 있었다.그시간따라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나는 그남자를 바라보며 발을 뗴지 못하는 영미를 윽박질러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걸으면서도 계속 외딴 바위에 홀로 있는 남자 생각에 우리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아저씨 죽으려고 그러는 아냐?”
“글쎄, 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
“이유가 뭘까?”
우리의 대화는 점점 추측에서 사실로 변해갔다.그리고는 마침내 내일 모레 서울에 올라가 신문을 보다가 지리산에서 추락한 남자에 대한 기사를 보는데까지 비약했다.나와 순덕이가 온갖 상상을 지어내며 떠들어내는 동안 영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아마 그남자에 대해 깊이 염려하고 있을것이다.세석산장에 도착할 즈음에는 몰려다니던 구름들이 검게 변하여 날씨는 급속히 어두워졌다.저녁을 준비하는데 영미가 옆자리에 취사를 하던 남자에게서 뜨거운 물에 덥힌 햇반과 깻잎 통조림 한통을 얻어왔다.어이구,굴르는 재주는 있네 싶어서 속으로 쓴웃음이 나왔다.출발할때부터 보채고 짜증낸 나에게 영미는 점잖게 앙갚음을 하는지도 몰랐다.다음날은 세석평전을 지나 연화봉에 오를 때까지 가랑비 소리를 내는 안개가 주변을 덮으며 우리를 따라왔다.가까이 걷지 않으면 쉽게 친구들 모습을 잊어버릴 정도로 안개가 깊었다.매번 올 때마다 지리산의 날씨는 한번도 같은 적이 없었다.나는 안개가 변할 때마다 사진을 찍느라고 예정된 시간을 넘기기가 일쑤였는데 영미와 순덕이는 잘 참아주었다.장터목산장이 보이는 지점에 이르자 안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멀리 제석봉까지 선명하게 산의 모습이 드러났다.우리는 장터목산장에 이르러 커피를 끓이기 위해 취사실에 들어갔다.어제의 그 남자가 언제 왔는지 취사실 한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버너위에 얹은 코펠의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저씨!”
반색을 한 영미가 그에게로 다가갔다.그도 반가운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어서들 오세요.연화봉에서 내려 오시는걸 봤습니다.”
“어떻게 된 거예요.우리가 빠른줄 알았는데.?”
“어떻게 되긴요.자,제가 커피를 대접해도 되겠지요?.”
산장 매점에서 산것 같은 일회용커피 몇개가 그의 옆에 있었다.눈치를 보니 얼굴이 그리 심각하지 않은것 같아 우리는 마음 놓고 웃으며 까불어댔다.
“아저씨,궁금한게 있는데요?”
“뭡니까?”
“아저씨는 다른 등산객들과 조금 다른 것 같아요.뭐하시는 분이세요?”
그는 일회용 커피를 종이컵에 하나씩 뜯어 넣으면서 빙긋이 웃었다.
“저요? 실직자입니다.”
“…”
“제가 증권회사에 다녔는데 그동안 잘나갔어요.그래서 형제랑 친척들이 저를 믿고 크게 투자를 했거든요.근데 그게 주가가 폭락해서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하게 됬지뭡니까.그래서 이리저리 수습을 해보려고 애썼지만 졸지에 저는 형제와 친구들 간에 죽일 놈이 된거죠.증시가가 떨어졌다고 해도 믿지 않고 사기꾼이라면서,뒤로 빼돌린 거 아니냐고요.”
그의 목소리가 억울함으로 가늘게 떨렸다.
“…”
“여자 분들은 모르실거예요.순간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절망 말입니다.그동안 나를 지켜주던 자존심도 지위도 모두 사라지고 이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싶은 패배감 같은거요.죽고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그런데 그 순간 대학교때 친구들이랑 갔던 지리산생각이 나는거예요.그래,죽으려면 지리산이나 한번 갔다가 죽자.아니면 지리산에서 죽어도 좋고,뭐 이렇게 된거죠.그래서 집사람한테도 아무 말 않고 왔어요.구례 역에서 김밥을 한 개 사들고 내렸는데 그 뒤로는 댁들을 만날 때까지 물만 먹고 지냈어요.산장에서 파는 음식을 사서 끓여먹을수도 있었는데 모든 게 다 귀찮았거든요.”
그의 이야기에 차마 어떤 추임새도 넣을 수 없었다.그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듣기만 할 뿐.
“올 때는 무작정 왔는데 집사람한테 전화가 왔어요.어디갔느냐구요.차마 죽으러 지리산에 왔다고 말 못하겠더라구요.중학교 초등학교 다니는 남매가 아빠 어디 갔냐면서 자꾸 찾는다구요.전화를 안 받으면 아내가 의심을 할까봐 계속 전화를 받았어요.그렇게 지리산에 와서 첫날은 그냥 무작정 걷기만 했는데 자꾸 마음이 헷갈리더라구요.그래도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마음이 더 컸어요.그런데 어제 아침에 저에게 식사를 나눠 주셨잖아요.자꾸만 그 친절이 마음에서 커지지 뭡니까.세상이 아직은 살만 하구나 싶어서요.집사람도 무슨 눈치를 챘는지 전화를 해서는 제발 집으로 돌아오라고 사정을 해요…사실 가족들이 무슨 죄가 있나요. 저 하나 없어지는 건 괜찮지만 아내와 철없는 애들에게 제가 져야할 책임을 넘기는 건 더 큰 죄를 짓는 거라는 생각이 자꾸 들더라구요.그래서 다시 시작해 보려고 내려 가는 중입니다.”
첩첩 산중에 모여든 사람들의 사연도 제각각 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 남자는 백무동계곡으로 내려갔다.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 오르는 좁은 길은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나는 영미와 순덕이의 뒤를 앞세우고 걸어가면서 뜸한것 같지만 심성 고운 영미의 껑충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야멸차게 군 자신이 조금 챙피했다.천왕봉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산리쪽으로 하산했다.우리 셋은 한적한 중봉쪽을 택했다.그곳에서 부터는 등산객이 우리밖에 없었다.한적한 써레 봉을 지나는 길은 정말 다양하고 아름다웠다. 마치도 감춰진 지리산의 속내가 그곳에 있는것 같았다.치밭목산장에서 유평리, 대원사로 이어지는 하산 길을 서둘러 내려오면서 계곡의 깊음과 넓음 크고 작은 바위들의 조화가 이루어내는 아름다움에 취했다.
가을이 깊어지면 계곡을 덮고 있는 숲의 빛깔이 정말 장관일것이었다.그 아름다움은 서로 다른 것들이 한데 모여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우리 인생도 그러할텐데... 대원사를 지나 버스정거장에 도착하여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집에서 기다리는 따뜻한 물과 입맛 도는 음식, 깨끗한 잠자리를 떠올리며 부르튼 발을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