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숲길 사려니 오름
김포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제주도 상공에서 오랫동안을 멈춰서 있었다. 안개가 심해서 주변을 전혀 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안개 속에서 두 시간 이상을 서있던 비행기는 결국, 김포로 돌아왔다. 내일 출발하는 비행기로 표를 바꾸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벌써 제주도에 도착했을 줄 알았던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자 언니왈, ‘비행기가 착륙하지 못해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우리 가족이 이런 일을 당한 것은 처음이야, 라면서 신기해했다.
다음날 김포로 떠나면서도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날짜를 바꿀 수 없어서 가긴 가지만 제주도가 장마철이어서 비가 오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 때문에, 그래도 할 수 없다. 일단 가자,
그런데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장마는 커녕 날씨가 너무 좋았다.
이번 제주도 여행의 첫 번째 목적은 사려니 오름에 가는 것이다. 작년에는 붉은오름에서 물찻오름까지 갔었는데 올해는 꼭 사려니 오름 정상을 가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마침 사려니 숲길 걷기 행사 중이라서 다른 때는 사전 예약을 하고 반대편으로 올라가야 하던 사려니 오름까지의 전체 숲길이 열려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숙소인 한화리조트에서 사려니 오름 입구까지 걷기로 했다. 리조트 입구에서 나와 절물휴양림을 지나 계속 걸었다. 조금 더 걸었더니 삼거리가 나오면서 오른편 길로 사려니 숲길 걷기 행사를 알리는 깃발들이 이어졌다.
이곳부터 길 양편으로 짙은 삼나무 숲이 펼쳐진다. 나는 숨을 크게 쉬면서 나무가 내뿜는 산소를 맡으면서 걸었다.
숲사이로 계곡이 보였다.
제주도의 계곡이 거의 그렇듯이 건천이어서 비가올대를 제외하고는 흐르는 물은 없었지만 바위사이에 고인 물속으로 나무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낼모레 진짜 장마가 시작되면 이 마른계곡에 물이 넘칠 것이다.
드디어 사려니 숲길 입구에 도착했다. 한화리조트에서 약 한 시간 정도 걸어온 것 같다.
숲길 걷기 행사요원들이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도에 와서도 산이나 숲만 찾는다고 놀림 받지만 제주도에 오면 바다를 만나는 것은 기본이고, 나는 숲과 나무가 정말 좋다.
산에 오르거나 숲으로 들어가면 나 역시 자연의 일부임을 느낄수 있기 때문이다.
숲길 걷기 행사요원들과 인사를 마치고 무성한 숲길로 들어섰다. 이제 즐기면서 걷기만 하면 된다.
그때 오른편 숲에서 야생 멧돼지가 나타났다.
깜짝 놀랐지만 소리를 내면 멧돼지가 흥분할까봐 조심하면서 멀리서 지켜보았다.
그 녀석은 땅에 코를 대고 천천히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동안을 길 가운데 서 있더니 왼쪽 숲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행인지 그곳엔 우리 둘 뿐이었다.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면 소리를 지르거나해서 멧돼지가 놀래서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
멧돼지가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늘의 목적지인 사려니 오름까지의 길은 총 15,4km이지만 정상에 이르기까지 10개의 구간으로 나누어 각각 특색 있는 안내표지판과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체력과 기분이 닿는 대로 어디든 머물다 갈 수 있는 자리가 있고, 구간의 거리가 짧아서 지루하지 않게 걸을수 있도록 해 놓았다.
빨간 산딸기가 소롯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잘 보니 주변으로 잘 익은 산딸기 열매가 흐드러져 있었다. 몇 알 따서 입에 넣으면서 걷는다. 크기에 비해 씨가 굵고 단맛은 없지만 어릴 적 소꿉장난 시절의 기억을 불러 일으켜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녹색의 숲속에서 빈 의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숲속으로 들어갈 수록 새소리는 다양해졌다. 가끔 본때없는 까마귀의 소리가 따라오기도 했다. 식물들이 뿜어내는 향기도 길을 걸을수록 조금씩 달랐다.
알 수 없는 향기와 새소리는 숲이 끝나는 곳까지 우리와 함께하면서 조금씩 지치는 걸음에 힘을 주었다.
어울려 살아가는 식물과 곤충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의 조화와 함께 사는 법을 자연에서 배운다. 자연은 하느님이 펼쳐 놓으신 커다란 책이기에.
같은 가지에 피면서도 색깔이 달라지는 꽃, 하늘을 향해 목련꽃 비슷한 모습으로 피어나는 때죽나무꽃이 한창이었다.
형광 빛으로 빛나는 야생수국등... 이루 셀 수 없는 숲속의 가족들이 뿜어내는 향기와 빛깔이
속속들이 나를 물들인다.
큰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에 빛나는 양치식물,
내가 이름을 불러 줄 수있는 식물은 몇되지 않는다.
이 숲속에 있는 식물의 종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다.
서로 다른 빛깔과 모양이 어울려 이루어내는 숲의 모습은 멋지게 어울리는 교향악과 같았다.
물찻오름으로 갈 수 있는 갈래길에 도착했다.
작년 가을, 이곳 물찻오름에 올랐을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분화구 호수에 비치고 낙엽을 떨군 나무 가지가 화환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은 입산을 통제하고 있는데 올 12월에 다시 출입을 허가한다고 한다.
물찻오름 입구에서 만난 소멸의 아름다움. 떠나는 것과 솟아오르는 것들은 한데 어울려 생의 순환을 이룬다. 제자리에서 할 일을 마치고 대지로 돌아가는 식물들, 그리고 다시 솟아나는 생명들. 원래는 하나가 아니었을까.
월든 숲 나무데크에 어르신들이 앉아서 점심을 드시고 계셨다.
아마도 도시락에 가득한 식사 외에 자연의 맛까지도 담뿍 담아 드셨겠지.
널찍한 네 개의 이파리 속에 주먹을 구부린 듯 한 보라색 꽃을 피우는 천남성.
모양새도 예사롭지 않은 이 식물은 강한 독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장희빈이 마신 사약이 바로 이꽃으로 만든것이라고한다.
작년 가을에 왔을때 이숲길 주변에서 빨간 몽우리가 모여 아이 주먹만큼한 크기의 열매를 맺은 식물을 많이 보았는데 알고보니 이천남성의 열매였다.
하지만 독이 있는 식물이 있다면 그독을 해독시킬 식물도 어디 있지 않을까.
사려니 오름 가까이 갈수록 나무숲은 더욱 울창해졌다.
잘 가꾸어진 숲속에 여러 방향으로 난 길은 나무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길인것 같다.
하지만 탐방객에게는 모든 길이 다 열려있지는 않다.
숲속에는 ‘채종원’이라는 곳이 있었다. 좋은 나무종자를 키워서 번식시키는 곳이라고 한다.
자연은 스스로 충만하지만 사람의 지혜와 사랑으로 더욱 더 그 가치가 확대될 수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진정한 공유의 삶을 보는것 같아 고마웠다.
30여 년 이상 자란 삼나숲은 그 울창함으로 경외심을 불러 일으킨다.
나무들도 저마다의 소리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음울하게 그들의 가락으로 노래하는 나무.
사려니 오름 아래까지 오자 맑았던 하늘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제 나무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사려니 오름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
나무계단은 점점 가팔라지면서 원시 그대로의 모습을 지닌 숲으로 들어갔다.
한낮인데도 숲속은 어두웠다. 나무들은 서로 엉켜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뿌리가 튀어나온 땅에는 낙엽이 깔려 있다.
그러고 보니 한여름이라도 원시림은 사계절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묘하고 신비스런 기분과 으시시함이 판타지 영화의 한장면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마침내 어두운 밀림에서 벗어나 하늘이 보였다.
말발굽 모양의 분화구를 가진 사려니 오름 정상에 다다랐다. 숲해설사가 밝은 웃음으로 맞아주었다. 와우! 마침내 이곳에 내가 서있구나.
‘사려니’는 분화구 주변에 돌들이 서리서리 둘러져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분화구 안에 수많은 종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한라산 중턱에 있는 이 사려니 오름 골짜기는 아직 오명되지 않은 최고의 청정지역이라고 한다.
짙은 안개가 끼어 주변이 멀리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쉬웠지만 마음이 열리는 느낌이 무척이나 시원했다.
오천 년전에 화산의 폭발로 생성되었다는 사려니 오름. 이곳에서 자라고 숨 쉬고 소멸되어간 식물과 생물에 대해 생각해 본다. 흙으로 돌아간 그들이 있었기에 또 이렇게 무성한 자연이 있지 않은가.
안개가 흩뿌리는 물방울로 몸이 축축해진다.
이곳까지 놀멍쉬멍 올라오는데 여섯 시간 정도 걸렸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온 편의 반대편으로 역시 나무계단이었다. 길이가 올라온 계단의 세배쯤은 되는
것 같다.
시원하게 위로 뻗은나무들을 올려다보면서 아쉽게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난대산림연구소로 이어져 있었다. 평소에는 이쪽을 통해서 사려니 오름에 올라갈수 있다고 한다.
오른편으로 벌을 치는 곳을 바라보며 산릴연구소를 벗어났다. 그곳은 셔틀버스정거장이었다.
숲길 걷기 행사기간이라서 출발지까지 태워다 준다는 것이다.
차를 탄 시간은 오후 네 시 반이 넘었다. 피곤해서 자꾸만 눈이 감기는 중에도 금방 떠나온 사려니 숲길과 오름, 그곳에서 만난 것들을 기억해본다.
처음에 왔던 사려니 숲길 입구에서 택시를 불러야 할까 망설이는데 어느 분이 우리를 한화 리조트 입구까지 태워다 주셨다. 제주도 여행을 할 때마다 친절한 천사를 만나 도움을 받곤 한다.
안개속에서 리조트 입구까지 걸어들어오면서 들판에서 풀을 뜯는 말들을 만났다.